대한민국 정당사
1948년 1대 총선
1948, 제헌의회 선거, 총 200석
- 대한독립촉성국민회 55석
- 한국민주당 29석
- 대동청년단 12석
- 한국독립당 1석
- 기타 군소 야당 18석
- 무소속 85석
정당 정치의 모색:
정당정치가 정착되지 못해 무소속이 강세였고 정당구조도 복잡했다. 이승만이 총재였던 대한독립촉성국민회는 신탁 통치에 반대하는 연합체에 가까워 정식 정당이라고 보기 어려웠다. 송진우, 김성수(사진 속 인물) 등이 주축이 된 한국민주당은 광복 후 지주, 자산가, 지식인 및 일부 친일파가 참여해 만든 반공성향의 우익정당이었다. 의석수는 적지만 영향력을 미치는 의원이 많아 원내 최대 세력을 형성했다. 한국민주당과 함께 보수정당의 양대 축이었던 김구의 한국독립당은 남한만의 단독선거에 반대해 불참했다.1
1950년 2대 총선
1950, 총 210석
- 대한국민당 24석
- 민주국민당 24석
- 대한독립촉성국민회 14석
- 대한청년당 10석
- 기타 군소 야당 12석
- 무소속 126석
한국민주당의 변신:
한국민주당은 이승만의 남한 단독정부 수립과 대통령중심제 도입에 결정적 역할을 한다. 정부 수립 이후 ‘실권’을 장악하려 기대했으나 각료 임명에서 철저히 배제되는 등 ‘찬밥’ 신세가 돼 이승만과 갈라선다. 이후 ‘야당’ 성향으로 변신, 대한국민당의 신익희, 대동청년단의 지청천 세력과 결합해 1949년 민주국민당으로 새출발한다. 국민회, 대한국민당, 대한청년단 등 친이승만 성향 우익 정당들은 훗날 자유당의 모태가 된다. 민주국민당 사진 속 인물은 당 대표였던 신익희.1
1954년 3대 총선
1954, 총 203석
- 자유당 114석
- 민주국민당 15석
- 대한국민당 3석
- 대한독립촉성국민회 3석
- 제헌국회의원동지회 1석
- 무소속 67석
대한민국 최초의 여당:
무능과 무책임으로 일관하던 이승만 정권은 더 이상 국회 간선으로 재집권하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추진한다. 권력재창출을 위해 평소 ‘정당무용론’을 주장하던 이승만은 자유당 창당을 도모한다. 이승만 추종 세력이 자유당으로 통합되자 막강한 위력을 발휘, 총선에서 압도적 층리를 차지한다. 자유당은 발췌 개헌(직선제), 사사오입 개헌(중임 제한 철폐) 등에 주도적 역할을 한다. 대한민국 최초의 본격 ‘여당’이었던 셈이다. 권력을 먼저 잡고, 뒷받침할 ‘여당’을 만드는 방식은 이후에도 계속된다.1
1958년 4대 총선
1958, 총 233석
- 자유당 126석
- 민주당 79석
- 통일당 1석
- 무소속 27석
민주당 계 정당의 태동:
사사오입 개헌으로 이승만의 종신집권 음모가 현실화되자 반대세력들이 결집해 ‘호헌동지회’를 결성했다. 이들을 중심으로 1955년 민주당이 창당된다. 발전적 해체를 선언한 민주국민당 세력, 장면·정일형 등 흥사단계, 자유당 탈당 인사, 무소속 등이 참여했다. 그러나 조봉암 등 진보 계열 인사들은 배제됐다. 통합의 위력이 발휘돼 의석 수는 크게 늘어 양당제의 토대가 구축됐다. 현재 더불어민주당은 이 민주당을 자신들의 모태로 소개하고 있다. 사진 속 인물은 민주당 대선 후보였던 조병옥.1
1960년 5대 총선
1960, 총 291석 (민의원 233석, 참의원 58석)
- 민주당 175(31)석
- 자유당 2(4)석
- 사회대중당 4(1)석
- 혁신동지총연맹 1(0)석
- 한국사회당 0(1)석
- 기타 군소 야당 3(1)석
혁명의 바람:
4.19 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물러나고 내각책임제로 헌법이 개정됐다. 국회를 해산하고 새로운 선거법에 의해 실시된 총선에서 민주당은 압도적인 승리를 거둔다. 사진 속 인물은 윤보선 대통령과 장면 총리. 역사상 처음 양원제로 국회가 구성된 선거이기도 했다. 사회대중당 등 혁신(진보) 계열 세력들은 4.19 혁명을 민주혁명으로까지 끌어올리자며 혁신정당을 창당했지만 소수 의석을 얻는데 그쳤다. 단일 대중정당을 만드는데 실패한 채 분열했고, 지식인 명망가 위주의 활동에 그친 탓이 컸다.1
1963년 6대 총선
1963, 총 175석
- 민주공화당 110석
- 민정당 41석
- 민주당 13석
- 자유민주당 9석
- 국민의당 2석
박정희당의 탄생:
5.16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박정희 세력은 민정이양 뒤에도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민주공화당을 만든다. 기성 정치인들의 정지활동을 금지한 상태에서 사전조직 작업에 나선 것, 4대 의혹 사건과 같은 부정한 방법으로 정치자금을 조성해 창당에 사용한 점 등은 두고두고 비판의 대상이 됐다. 야당 진영은 단일 정당을 추진하기도 했지만 대통령 후보 지명 등에서 의견차를 보이며 구 민주당 구파 중심의 민정당, 신파 중심의 민주당 등으로 결국 분열한다.1
1967년 7대 총선
1967, 총 175석
- 민주공화당 129석
- 신민당 45석
- 대중당 1석
합당과 분열의 연속:
야당의 난립 때문에 총선에서 패배했다고 생각한 야권은 통합을 추진한다. 민정당과 민주당이 민중당으로 결합했으나 윤보선의 탈당으로 다시 내분에 휩싸인다. 한일회담 반대에 미온적이라는 이유였으나 대표 최고위원 선거에서 패배한 것이 컸다. 이후 윤보선은 신한당을 창당한다. 그러나 결국 민중, 신한 양당은 야당 대통령 후보 단일화라는 여론에 밀려 합당을 선언하고 신민당을 출범시킨다.1
1971년 8대 총선
1971, 총 204석
- 민주공화당 113석
- 신민당 89석
- 민중당 1석
- 국민당 1석
신민당의 성장:
민주공화당은 여전히 제1당의 지위를 유지했지만, 야당인 신민당이 과반에 육박하는 의석을 차지했다. 앞서 대통령 선거에서도 신민당 김대중 후보는 공화당 박정희 후보에 94만여 표의 근소한 차로 패배하기도 했다.1
1973년 9대 총선
1973, 총 219석
- 민주공화당 73석
- 유신정우회 73석
- 신민당 52석
- 민주통일당 2석
- 무소속 19석
어둠 속 정당들:
박정희 독재를 위한 유신체제가 출범하면서 국회와 정당 활동은 대폭 위축됐다. 대통령은 전체 국회의원의 3분의1을 추천할 수 있었다. 이들 임명제 의원은 유신정우회라는 별도의 교섭단체를 만들어 활동했다. 유신체제 하에서도 야당이 52석이나 얻을 수 있었던 것은 한 선거구에서 2명을 선출하는 중선거구제가 도입돼 ‘여야 동반당선’이 가능했기 때문이었다.1
1978년 10대 총선
1978, 총 231석
- 유신정우회 77석
- 민주공화당 68석
- 신민당 61석
- 민주통일당 3석
- 무소속 22석
정당 밖의 정당:
총선 결과 민주공화당이 더 많은 의석을 차지했지만 득표율은 신민당이 1.1%나 더 높았다. 유신체제가 국민의 지지를 잃어가고 있다는 증거였다. 1974년 신민당 총재로 선출된 김영삼은 독재정권에 맞서 유신체제를 폐지하겠다는 의사를 분명히한다. 그러나 정권 차원에서 신민당과 김영삼을 무력화시키려는 시도가 계속된다. 이 시기에는 제도권 정당보다는 시민사회단체들의 유신 반대, 민주화 운동이 정국을 이끌어가는 ‘준정당’의 역할을 하기도 했다.1
1981년 11대 총선
1981, 총 276석
- 민주정의당 151석
- 민주한국당 81석
- 한국국민당 25석
- 기타 군소 야당 8석
- 무소속 11석
허수아비 정당 시대:
12.12 사태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한 신군부는 민주정의당 창당에 나선다. 모든 정치활동을 금지시켜 놓고 자신들만 비밀리에 창당을 진행한 것은 앞서 5.16 쿠데타에 이은 공화당 창당 때와 같았다. 다만 신군부는 정당 간 경쟁 자체를 용납하지 않았다. 대신 야당 역할을 할 위성정당들이 만들어졌다. 정치활동 규제 대상에서 제외된 야권 정치인들은 신군부의 개입 아래 민주한국당을 만들었다. 공화당과 유신정우회 출신 일부는 한국국민당을 결성한다. 두 야당 모두 ‘집권의 포부’는 없었다.1
1985년 12대 총선
1985, 총 276석
- 민주정의당 148석
- 신한민주당 67석
- 민주한국당 35석
- 한국국민당 20석
- 기타 군소 야당 2석
- 무소속 4석
민주화의 길목:
유명 야당 정치인들의 정치활동 금지가 서서히 풀리기 시작했다. 김영삼·김대중 세력은 연합해 민주화추진협의회를 결성하고 관제 야당인 민주한국당을 넘어설 신당 창당에 나선다. 이름은 과거 유신에 맞서 싸웠던 ‘신민당’을 계승한다는 의미에서 ‘신한민주당’으로 정한다. 총선 결과 신한민주당은 제1야당으로 부상하고 민주한국당은 몰락의 길을 걷는다.1
1988년 13대 총선
1988, 총 299석
- 민주정의당 125석
- 평화민주당 70석
- 통일민주당 59석
- 신민주공화당 35석
- 한겨레민주당 1석
- 무소속 9석
김영삼, 김대중의 분열:
1987년 6월 항쟁의 민주화 열기를 타고 직선제 개헌이 이뤄진다. 야당을 대표하던 김영삼·김대중 두 정치인은 더 선명한 야당을 표방하며 신한민주당을 차고 나와 통일민주당을 창당한다. 그러나 두 사람은 결국 갈라서게 되고 김대중은 통일민주당을 탈당해 평화민주당을 창당한다. 야권 분열로 정권교체는 실패로 돌아가고 민주정의당 노태우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된다. 그러나 총선에서는 의정 사상 최초로 여당의 의석이 야 3당 의석보다 적은 ‘여소야대’ 정국이 실현됐다.1
1992년 14대 총선
1992, 총 299석
- 민주자유당 149석
- 민주당 97석
- 통일국민당 31석
- 신정치개혁당 1석
- 무소속 21석
김영삼, 김대중의 분열:
여소야대는 오래가지 못했다. 1990년 민주정의당,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이 합당해 민주자유당을 창당하고 거대 여당으로 자리매김한다. 김영삼은 쿠데타 정권의 재등장을 막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고 주장했지만, 제2야당으로서 불안한 지위를 해소하고 권력을 잡기 위한 목적이 컸다. 3당 합당에 반대한 통일민주당 세력은 ‘꼬마민주당’으로 남은 뒤 김대중의 평화민주당과 합당해 민주당을 이룬다. 현대그룹 정주영 명예회장은 기성 정당의 공천에서 떨어진 정치인들을 중심으로 통일국민당을 창당한다.1
1996년 15대 총선
1996, 총 299석
- 신한국당 139석
- 새정치국민회의 79석
- 자유민주연합 50석
- 통합민주당 15석
- 무소속 16석
김대중의 복귀:
14대 대선 패배 이후 정계 은퇴를 선언했던 김대중은 2년7개월만에 정계복귀를 선언하고 기존 민주당과 별도로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한다. 민주당 소속 의원들은 대거 국민회의 쪽으로 당적을 옮긴다. 여당인 민주자유당 내에서도 김영삼 추종세력이 김종필 대표 체제에 불만을 제기하기 시작하고 김종필은 탈당해 자유민주연합을 창당한다. 민주자유당도 당명을 신한국당으로 바꾸고 새출발을 다짐한다. 이로서 3당 합당은 5년여만에 막을 내린다.1
2000년 16대 총선
2000, 총 273석
- 한나라당 133석
- 새천년민주당 115석
- 자유민주연합 17석
- 민주국민당 2석
- 희망의한국신당 1석
- 무소속 5석
대선과 헤쳐모여:
15대 대선을 앞두고 신한국당의 대통령 후보로 이회창이 선출되지만, 이인제는 이에 불복해 국민신당을 창당하고 별도로 출마한다. 분열로 위기에 처한 신한국당은 민주당과 합당해 한나라당을 출범시킨다. 김대중과 김종필은 DJP 연합으로 대선에서 승리하지만 내각제 개헌을 두고 견해차를 보이면서 분열한다. 김대중은 집권 뒤 개혁과 보수를 아우르는 전국 정당을 표방하며 새천년민주당을 창당한다.1
2004년 17대 총선
2004, 총 299석
- 열린우리당 152석
- 한나라당 121석
- 민주노동당 10석
- 새천년민주당 9석
- 자유민주연합 4석
- 국민통합21 1석
- 무소속 2석
열린우리당과 민주노동당:
새천년민주당, 한나라당, 개혁국민정당 내에서 정치개혁과 지역주의 타파를 내세운 의원들이 새롭게 열린우리당을 결성한다. 노무현 대통령이 열린우리당을 지지하는 발언을 했다가 탄핵을 당하자 이에 반대하는 시민들의 촛불시위가 벌어져 이 바람을 타고 열린우리당은 총선에서 과반을 차지한다. 이와 함께 민주노동당이 10석을 얻어 원내 제3당으로 부상했다. 1960년 사회대중당 이후 진보정당으로서는 44년만의 원내 진출이었다.1
2008년 18대 총선
2008, 총 299석
- 한나라당 153석
- 통합민주당 81석
- 자유선진당 18석
- 친박연대 14석
- 민주노동당 5석
- 창조한국당 3석
- 무소속 25석
친박이라는 이름의 정당:
한나라당 공천에서 대거 탈락한 친박근혜계 인사들이 탈당해 친박연대를 결성하거나 친박 무소속 연대를 만들었다. 자유민주연합은 17대 총선 참패 이후 심대평 등이 탈당해 국민중심당을 결성하고 이회창 세력과 합쳐져 자유선진당, 선진통일당으로 이어진다. 열린우리당은 17대 대선을 앞두고 탈당 사태가 벌어져 대통합민주신당으로 재편되었다가 대선 패배 이후 민주당(새천년민주당)과 합당해 통합민주당(뒤에 민주당으로 개칭)이 된다. 민주노동당은 일심회 사건을 계기로 진보신당으로 분열한다.1
2012년 19대 총선
2012, 총 300석
- 새누리당 152석
- 민주통합당 127석
- 통합진보당 13석
- 자유선진당 5석
- 무소속 3석
박근혜의 새누리당:
민주당은 18대 대선을 앞두고 한국노총과 친노무현 그룹, 시민사회세력과 합당해 민주통합당(이후 민주당으로 개칭)을 창당한다. 한나라당은 2011년 10.26 재보궐선거 패배 뒤 박근혜 비상대책위원장을 중심으로 재편해 2012년 새누리당으로 당명을 바꾼다. 진보정당 세력들도 총선을 앞두고 민주노동당, 국민참여당, 진보신당 탈당파 등이 모여 통합진보당을 창당한다.1
2016년 20대 총선
2016, 총 300석
- 더불어민주당 123석
- 새누리당 122석
- 국민의당 38석
- 정의당 6석
- 무소속 11석
문재인과 안철수:
18대 대선 과정에서 급부상한 안철수는 새정치연합 창당을 준비하다가 민주당과 합당을 결의, 새정치민주연합이 출범한다. 그러나 7.30 재보궐 선거 패배로 김한길, 안철수 공동대표 체제는 막을 내리고 이후 문재인을 중심으로 더불어민주당으로 재편된다. 그 과정에서 안철수와 비주류 의원들이 탈당해 국민의당을 만든다. 통합진보당은 부정 경선 사건을 겪은 뒤 패권적 당 운영을 비판하는 이들이 탈당해 진보정의당(이후 정의당 개칭)을 만든다. 통합진보당은 내란음모 사건에 휘말려 헌법재판소가 해산을 결정한다.1
2020년 21대 총선
2020, 총 300석
- 더불어민주당+더불어시민당 180석
- 미래통합당+미래한국당 103석
- 정의당 6석
- 국민의당 3석
- 열린민주당 3석
- 무소속 5석
준연동형 비례대표제와 위성정당들:
준영동형 비례대표제가 도입되고 미래통합당이 위성 정당인 미래한국당을 창당하자 더불어민주당도 위성 정당인 더불어시민당을 창당한다. 두 위성 정당은 총선 후 미래통합당, 더불어민주당과 각각 합당하며 소멸된다. 더불어민주당은 총 180석을 차지하며 거대 여상을 이룬다.1